2013년 정보공유연대 IPLeft 기획강좌 <우리 이웃의 괴물, 특허와 저작권> 자료
(에이즈)의약품접근권투쟁, 그 배경과 20년
권미란(정보공유연대)
세계의약품 시장은 어머어마하게 크다. IMS Health에 따르면 2009년 세계의약품 시장 규모는 8,370억 달러(약 1,068조원)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08년 456억 달러)의 약 17배에 달한다. 2009년 전 세계의약품 시장에서 북미, 유럽, 일본이 79%를 차지했다(2007년에는 86,4%). 이 사실은 초국적제약회사에게는 누가 돈을 내고 약을 먹을 수 있는지와 같은 말이다. 돈이 되지 않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환자들은 초국적제약회사에게 ‘고객’이 아니다. 초국적제약회사들은 미국과 유럽에 제일 먼저 출시를 하면서 그 곳에서 팔릴 수 있는 최대의 가격으로 약값을 정하고, 그 가격을 다른 나라에 강요한다.
초국적제약회사의 ‘고객’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약을 먹고 있을까? 이들에겐 인도가 “약국”이다. 인도는 항생제, 항암제, 혈압약, 당뇨약 등 전 세계 제네릭(복제약) 시장의 20%에 해당하는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특히 12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는 에이즈치료제의 90%가 인도산 제네릭이고, 전 세계 에이즈치료제의 50%를 인도에서 공급하고 있다. 제네릭이 약값을 낮추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왜 인도가 “세계의 약국”이 될 수 있었는지는 에이즈치료제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에이즈치료제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때는 1995년부터이다. 트립스협정 발효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예상되듯이 대부분의 에이즈치료제는 특허가 있고 비싸다. 브라질은 90년대 후반부터 국영제약회사를 통해 에이즈치료제를 생산하여 무상으로 공급해왔는데, 2000년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되던 1차 에이즈치료제(스타부딘, 라미부딘, 네비라핀 혼합복용)를 오리지널 약값의 1/4에 공급하였다. 그러자 2001년 1월에 초국적제약사는 브라질의 제네릭만큼 파격적인 가격인하를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에이즈치료에 있어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인도산 제네릭의 기여가 시작되었다. 2001년 2월부터 인도제약사들의 제네릭 경쟁이 지속되면서 2005년 2월 기준 오리지널 약값은 562달러, 인도산 제네릭 약값은 168달러로 인하되었다.
그렇다면 제약산업이 꽤 발달된 우리나라는 왜 “세계의 약국”이 되지 못했고, ‘글리벡’, ‘푸제온’같은 약을 먹지 못해 환자들이 투쟁을 해야했을까? 초국적제약회사외에 다른 나라에는 아예 제약회사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국에 제약회사가 있어도, 제네릭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도 만들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의 출범과 함께 그 부속협정인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 트립스협정)가 발효되어 전 세계적으로 특허제도가 통일되었다. 동물, 인체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특허의 대상이 되었고 20년간 특허보호기간을 보장해야했다. 특허권자는 특허보호기간동안 특허품을 생산, 판매, 수입, 수출 등을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의약품 독점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제도가 있다. 자료독점권이다. 의약품 판매승인을 받기위해 보건당국에 제출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안전성, 유효성에 관한 임상시험자료를 제네릭 제조회사가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네릭 출시를 지연시켜 오리지널 의약품의 독점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자료독점권이 부여되면 특허가 없는 혹은 특허가 만료된 의약품일지라도 판매독점권이 생기게 되어 제네릭 생산과 수출을 못하게 된다. 자료독점권은 특허권에 비해 독점기간이 짧지만, 그 효과가 같고 훨씬 간편한 절차를 거쳐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초국적제약회사들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특허보다는 자료독점권을 통해 독점을 획득해왔다. 인도가 “세계의 약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72년에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제도를 폐지하였고, 자료독점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도 WTO에 가입함에따라 2005년에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해야했다.
초국적제약기업들은 기존의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에버그리닝 전략”에 주력하는 등 트립스협정보다 더한 특허보호기준을 전 세계적으로 강요함과 동시에 ‘세계의 약국’을 고립시키고 없애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한 초국적제약기업은 특허권의 강화뿐 아니라 각국의 의약품제도, 의료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정부를 직접 제소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고자 한다. 의약품 분야만 보더라도 한미FTA는 지금껏 체결된 무역협정 중 최악이다. 즉 FTA 지적재산권 챕터에서는 트립스협정보다 특허대상을 확대하고, 특허를 쉽게 획득하고, 특허기간을 연장하고, 자료독점권과 허가특허연계를 통해 독점기간을 늘릴 수 있도록 하며, 의약품챕터에서는 약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의약품 관련 법, 정책에 미국이 정식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한미FTA보다 강력한 FTA협상이 진행중이다. 바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한미FTA가 발효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로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정책을 TPP를 통해 더욱 본격적이고 자신감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미국은 TPP가 최소한 한미FTA협정안을 기본으로 해야하며, 위조방지무역협정(ACTA)보다 강력해야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즉 TPP는 한미FTA-plus이다. 여기에 중국이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을 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본격화되었다. 게다가 RCEP은 ‘동아시아 경제통합’에 대한 아세안과 한중일간, 한.중.일간의 긴장속에서 탄생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한중일FTA와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유럽연합은 2006년에 “글로벌 유럽” 통상정책을 천명하고 2009년 12월에 리스본 조약 발효후 태국, 인도, 일본, 캐나다, 미국과의 FTA협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FTA는 양자협정이지만 양국의 약속으로 끝나지 않고 도미노게임처럼 번져 결국에는 ‘세계 규칙’을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규칙의 변화”에 대응하는 운동주체의 역량과 상황의 측면에서 보면 2012년에는 TPP를 중심으로 미국단체들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운동단체들의 항의가 있었고, 인도, 태국, 캐나다와 FTA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유럽연합이 자료독점권과 투자(투자자국가분쟁 포함)를 포함하는 것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미약하나마 TPP반대투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한미FTA발효후 별다른 대응전략과 투쟁흐름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EU FTA와 TPP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인도는 “세계의 약국”이기때문이고, TPP는 “아시아의 나프타”가 되어 “세계규칙의 변화”가 이뤄지게 됨으로써 TPP회원국들이 의약품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주권과 능력을 잃을 뿐만아니라 인도의 제네릭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WTO반대투쟁에서 갑자기 우후죽순격으로 발발했던 FTA를 막아내기위한 개별투쟁으로의 전환은 동력과 효과성면에서 분산될 수 밖에 없었고, 뿐만아니라 TPP, RCEP 등 FTA를 통해 경제통합(시장통합)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운동단체의 대응전략은 더욱 막막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의약품접근성의 상황은 2000년대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 90년대말부터 “모두에게 에이즈치료제를”이란 구호를 내걸고 1차 에이즈치료제를 생산, 공급하기위한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1차 에이즈치료제의 파격적 가격인하를 이뤄낸 10년간의 경험은 희망과 절망을 둘 다 안겨주었다. 10년간 에이즈치료를 받게 된 개발도상국의 에이즈감염인수는 2010년 말 현재 약 660만명으로 늘었지만, 치료가 필요한 900만명의 에이즈감염인이 여전히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다 2, 3차 에이즈치료제는 비싸서 ‘그림의 떡’이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 사회운동단체들이 국제적으로 공동투쟁으로 확대시킬 수 있었던 사안은 “세계의 약국”지키기와 2차 에이즈치료제인 ‘칼레트라’의 복제약을 생산, 공급하기위한 지구적 캠페인이다. 이는 운동단체들의 대안 내지 대응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핵심적으로는 두가지 전술 즉 “에버그리닝 막기(특허적격성 엄격화, 특허반대신청 등)”과 강제실시 투쟁이다. 따라서 치료효과면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이지 않으면 특허를 주지않는 인도특허법은 일종의 모델로 인식되고, 특허반대신청제도 같은 제도의 도입 및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강제실시는 여전히 많은 한계와 실패를 낳고 있지만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에서의 강제실시는 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강제실시권을 허락받으면 특허권자의 허락없이 특허약과 똑같은 약을 생산, 판매할 수 있다. 트립스협정에서 강제실시를 허용하고 있지만 초국적제약자본과 선진국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강제실시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서 강제실시를 못하게 하기위해 온간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2000년대에 미국, 캐나다 등의 선진국을 제외한 브라질, 말레이시아, 베트남, 모잠비크, 잠비아 등에서의 강제실시는 ‘정부가 직접’ 한 것이었고 주로 ‘국가비상사태(national emergency)’나 ‘긴급상황(extreme urgency)’에서의 ‘1차 에이즈치료제’에 대한 강제실시가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7~2008년에 태국정부가 1차 에이즈치료제뿐만아니라 ‘2차 에이즈치료제’와 ‘항암제’, ‘심장약’ 등을 건강보험제도를 통해 공급하기위해 ‘공공의 이익을 위한 비상업적 목적’의 강제실시를 발동했다. 그리고 2012년 3월에는 인도에서 최초로, 게다가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최초로 허락받은 강제실시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2012년 9월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꺼번에 7가지 에이즈치료제에 대해 강제실시를 발동했다.
또 하나 긍정적인 것은 UN 및 산하기구의 입장이 다소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특히 UNAIDS, UNDP, WHO(+글로벌펀드, UNTAID) 등은 에이즈운동진영의 투쟁과 노력이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001년에 WTO각료회의는 “트립스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지만 2011년 3월에서야 WHO/UNDP/UNAIDS는 “에이즈치료접근을 향상시키기위해 TRIPS 유연성 활용하기(Using TRIPS flexibilities to improve access to HIV treatment)”란 제목으로 공동정책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011년 6월에 ‘에이즈에 관한 유엔고위급회의(UN general assembly high level meeting on HIV/AIDS)’에서 ‘에이즈에 대한 정치선언문(Political Declaration on HIV/AIDS: Intensifying our Efforts to Eliminate HIV/AIDS)‘이 채택할 때 최대의 쟁점은 FTA였다. 유엔은 2015년까지 1500만명의 에이즈감염인에게 에이즈치료제를 공급하겠다는 목표, 일명 “15by15”를 세웠지만 의약품접근권을 훼손하는 원인으로써 지적재산권과 FTA의 폐해를 명백히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15by15를 달성하기위한 방법으로는 트립스유연성을 활용하라는 선언에 그침으로 FTA 및 위조방지무역협정(ACTA)을 추진하는 정부와 초국적제약자본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회피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2012년 5월 31일 UNDP/UNAIDS가 발표한 “공중보건에 대한 FTA의 잠재적 영향(The Potential Impact of Free Trade Agreements on Public Health)”은 FTA가 의약품접근권에 미치는 폐해를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수많은 FTA가 트립스협정보다 강력한 지적재산권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트립스-플러스조항으로 ①특허적격성 완화(Broadening Patentability), ②특허반대신청 제한(Restricting Patent Oppositions), ③특허기간확대(Extending Patent Duration), ④자료독점권(Test Data Exclusivity)과 허가-특허연계(Patent-Registration Linkage), ⑤ 집행(IP Enforcement Requirements)을 적시했다. 하지만 핵심은 ‘TRIPS협정상의 유연성의 혜택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를 위해 FTA에 TRIPS-plus조항이 포함되는 것을 막아야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런데 2012년 7월 9일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조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법과 에이즈에 대한 국제위원회는 보고서“Global commission on HIV and the Law: Risks, Rights & Health”에서 새로운 지적재산권 체제를 마련할때까지 트립스 협정 유예, 트립스플러스(FTA등) 강요중단, 트립스유연성 적극 활용을 권고했다.
** 프리젠테이션 자료와 참고자료 2개가 아래에 첨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