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공유연대 운영위원 칼럼
질병과 건강은 무엇보다 정치의 문제다.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에 화폐처럼 가격이 붙는다는 것은 적절하고 적당하다”
1915년 있었던 제1회 세계보험회의에서 나온 말이다. 기괴해 보이는 이 말은 당시에는 조심스러운 선언이었지만, 그 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그 의미는 명확해졌다. 1924년 생명보험자 연차 대회에서 한 강연자는 “경제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새로운 발달은 인간 생명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간의 생명, 건강, 질병, 죽음은 이제 중요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재화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1930년대 듀블린과 로트카는 연령에 따른 함수식을 만들어 최초로 남성의 자본 가치를 추정했다. 그들에 따르면 각각의 생명은 다른 금전적 가치를 가지며 계층별로도 그 가치를 구분할 수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담론을 논란의 여지 없이 체화하고 있다. ‘어찌 감히 고귀한 인간의 생명에 가격을 매길 수 있지’라는 도덕주의적 비판은 이미 무력해 진지 오래다. 그런 도덕적 견해는 순진한 윤리학자의 머릿속에서만 무력하게 잔존해있을 뿐이다.
1980년 정신의학의 성서라 불리는 ‘정신질환 진단통계편람-Ⅲ’(DSM-Ⅲ)에서는 마침내 동성애가 공식적인 질병 목록에서 영구 삭제되었다. 당시 미국정신의학협회 의장이었던 멜빈 삽신(Melvin Sabshin)은 DSM-Ⅲ를 경유하여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의 승리가 이루어졌다고 포고했고, 90년대에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몸짓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임을 알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과학의 외피를 둘렀을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과학의 승리가 포고되고 바로 직후 1981년 AIDS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고, CDC는 곧바로 AIDS를 동성애자와 관련지으며 그것을 “동성애자와 관련된 면역결핍증(Gay-related-immune-
그것이 미국만의 일이었을까. 한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85년 한국에서 최초로 AIDS 증상을 보이는 이가 발견된 이후의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반응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극도의 공포를 조장하는 유언비어의 확산이었다. AIDS는 ‘우리’와 무관한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며, 외국인에 대한 AIDS 검사를 강제하여 유입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 이런 반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 극에 달했다. 소위 진보 운동 진영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외국’을 ‘미국’과 ‘제국주의’로 치환했을 뿐이다. AIDS가 바이러스를 통해 전염되며, 도덕적인 ‘우리’가 아닌 외부로부터 “침투”해 들어온다는 전형적인 타자화, 배제의 논리를 포함한 반응의 하나인 셈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변한 것이라고는 AIDS를 아프리카의 가난과 연결해 (공포스러운 타자의 변형일뿐인) 불쌍한 타자를 만들어내고, 고가의 애플 핸드폰을 구입하며 ‘레드 프로젝트’에 동참해 내가 아닌 타자를 돕는다는 거짓 도덕심에 불타오르며 소비를 지향하게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게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까? 잠시 고개를 돌려보자. 공적 연구를 기업이 독점해 자유로운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아버린 미국의 베이-돌 법, 해치-왁스만 법 , 그리고 그 법에 근거해 성장한 거대 제약회사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비싼 약을 먹지 못해 생명을 위협받는 사람들, 선진국에서 진행할 수 없는 위험한 임상시험을 하청받아 가난한 나라에서 그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위탁연구기관(CRO)들, 병원에 자신의 몸을 팔아 임상시험 참가비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잉여 환자군.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약으로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부자 나라의 시민들. 심지어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의학 연구에서마저 배제되어 버린 말리리아와 결핵, 수명병과 같은 열대 질환들.
이런 상황이 의료 산업의 로비와 정부 관료의 부패, 의학자들의 비윤리성 등이 만나 만들어진 일시적인 오류의 체계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근본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의학자들에게 의료윤리를 강조하고, 정부 관료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이런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적 일화로 끝나는 문제도 주관적 판단과 실천의 효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 필연적인 객관적 조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지식 생산 체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특허가 개입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특허는 흔히 특정한 지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발명자가 보상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 발명과 과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체계라고 간주된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보상체계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지식의 생산, 소비, 유통을 통제하여 특정한 지식 생산 체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지식 생산 체계라는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연구’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에게 특허는 한 국가뿐 아니라 글로벌한 차원에서 보호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특허를 보호할 수 있는 지구적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시스템은 가난한 국가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버린다. 구제금융, 조건부 차관 등의 대가로 구조조정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난한 국가들의 공적 의료 시스템을 파괴하고, 위험한 임상시험을 가로막는 윤리 조항을 삭제한다. 그를 통해 세계의 약국이라 불렸던 인도와 같은 나라의 특허법을 무력화시켜 대안적 체계를 망가뜨린다. 이 과정에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국제기구, FTA, ACTA, TPP와 같은 무역 협정이 등장한다.
이 거친 개괄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 건강, 질병, 죽음을 개인의 문제 혹은 중립적인 의료 지식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며, 경제와 자신의 거리를 신축시키며 결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는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문제의 뿌리가 깊을 뿐이다. 이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을 확보해 보장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복지의 확대, 안전장치의 재확보와 같은 방식은 문제의 뿌리를 감추는 효과를 가진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의 호황기라는 특수한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복지체계, 그 복지에 대한 요구가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을 문제 삼던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경제와 사회의 적대로 환원하면서 제출된 (매력적이지만 비겁한) 초라한 대안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근본적인 의미에서 건강과 질병을 규정해온 과학의 언어, 그 과학의 언어를 규정해온 특허와 같은 지식 생산 구조, 그리고 그 구조의 확장으로써의 전 지구적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ipleft 운영위원 허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