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소개한 정보공유의 역사를 살펴보면 1973년 스테포드 비어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나와 있습니다. http://www.dsl.org/copyleft/timeline/ 스테포드 비어는 2001년인가 2002년에 이땅을 떠났는데, 그의 전 일생을추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벅찬일이라 칠레에서 그의 실험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아래글은 그것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기관지노힘 제39호 김해민 (노동자의 힘 회원)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1970년 칠레에서는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었다. 선거를 통해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일부 부르주아 정당 연합인 민중연합(Unidad Popular)의 아옌데 후보가 36.3%를 획득하여, 결선 투표에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당시 아옌데 정부에 남겨진 것이라곤 파탄에 빠진 공장과 탄광 그리고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 봉쇄 정책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옌데 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로 평화적 전환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련식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칠레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 추진과 함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현 경제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중앙 집중적인 관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분권적이며 민주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칠레 정부는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흥미로운 실험을 시작하였는데,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 Cybernetics synergy)”이 바로 그것이다(1971). 프로젝트 사이버신프로젝트 사이버신은 스테포드 비어(Stafford Beer)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에 따라 칠레의 국가 경제에 대한 경영구조를 통합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사이버네틱스란 정보가 어떻게 수신, 송신, 저장, 재생되며 다시 순환된 새로운 정보가 과거의 정보와 결합하여 자동 수정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로 통신기술과 정보처리기술을 바탕으로 구현되고 있다. 스테포드 비어의 사이버신 시스템은 인간의 신경 구조 동작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경구조를 뇌에 의해 통제되는 수직구조 시스템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는 탈 중심적이며 잘 분권화 되어 있는 네트워크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스템은 하부 시스템에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정보 후진국 칠레에서는 완성할 수 없으며, 설사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대한 방대한 정보 처리는 시스템 과부하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들은 이 실험에서 장벽이 되지 못했다. 이전 기독교 민주당 정부가 창고에 처박아 놓은 텔렉스(telex) ( 전화의 자동 교환과 인쇄 전신의 기술을 이용한 기록 통신 방식. 다이얼 등으로 상대 가입자를 호출하며 인쇄 전신기에 의해 통신함.)와 극초단파 라디오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었다. 이 장치들을 전국의 공장들에 배치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그것을 다시 2대의 중앙컴퓨터가 있는 칠레 수도 산디에고에 연결하여, 전국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었다. 스테포드 비어와 그의 동료들은 이 네트워크 시스템과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1972년 10월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초기형태의 전국적인 사이버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사이버신 시스템의 주요 내용은 각 공장-산업 단위에서 노동자들의 협동 경영을 통해 올라온 전국적 규모의 정보를 통계 처리하여 쉽게 가공된 정보로 가공하여 노동자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여 이용할 수 있게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사항과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하는 통로로도 사용되었다. 사이버신 시스템은 모든 기업들에 대해 노동자-민중들이 언제든지 산디에고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서 접속할 수 있게 허용하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노동자, 민중과 정부와의 관계를 예전 보다 더욱 평등하고 굳건한 관계로 전환시켜 주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이 시스템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1972년 칠레전역에 국영 운송기업 설립을 반대하는 기업주들이 공장폐쇄를 단행했을 때 이 시스템은 각 지역의 식량과 연료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옌데 정부는 빠른 대응을 할 수 있었고 자본가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옌데 정권의 배신과 몰락그러나 문제는 아옌데 정부에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지속적인 파업과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굴복한 아옌데 정권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군부와 타협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해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국유화, 농지개혁을 중지하고 중소 부르주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투자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은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참여 과학자들과 다른 지향을 갖는 과학자들이 이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종종 초기 설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의 이러한 정책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아울러 미국의 경제 봉쇄와 자본가 계속된 파업으로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다. 스테포드 비어는 산디에고를 떠날 것을 권고 받기도 했지만, 그는 숨어 다니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73년 9월 10일, 라모네다 대통령궁에 새롭게 갱신한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바로 그 다음날, 1973년 9월11일, 미 CIA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대통령궁에 포탄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스테포드 비어는 다행히 몸을 피했지만, 곧 아옌데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칠레의 폭압적 군사정권에 의한 비극은 시작되었다. 칠레의 군사 정권은 이 실험적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 설계자들을 불러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평등한 특성을 가진 사이버신 시스템은 강압적 군사정권과는 태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 실험은 75%만 국가 경제 시스템을 사이버신에 집적한 미완의 상태에서 파괴되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갔다.그 후 30년아옌데 정권의 이 실험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빅브라더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이버신 시스템은 초기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 이념과 칠레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주 집중 원리와 자주관리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이 시스템에서 진정한 약점은 그 프로젝트가 오직 위로부터 추진되었다는 점과 임노동과 이윤을 기초로 하는 경제에 밑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칠레 사회주의 정권시기에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125개의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관리를 실험하고 있었다. 일부 보고에 따르면 칠레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하에 공장이 개인 소유의 공장 보다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결근 비율도 훨씬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파업이 치열했던 1972년에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자본가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산물을 노동자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인 ‘꼬르돈 인더스트리얼(cordones industriales)’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했고 소환권을 보장했다. 이 조직은 일종에 초보적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만약 옌데 정부가 이들 노동자들과 같이 했다면,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과 위로부터의 사이버신 시스템 계획이 결합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칠레에서 ‘사회주의 인터넷’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인터넷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첨부 파일과거 URLhttp://www.ipleft.or.kr/bbs/view.php?board=ipleft_5&id=211
[펌]사회주의 인터넷-칠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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