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5일 ~ 22일 인도 델리 방문 보고서1)
: 의약품 접근권 운동의 제(諸) 논의들
홍지은, 정보공유연대IPLeft
2010. 4. 14
• 방문 시기 : 2010년 1월 15일 ~ 2010년 1월 21일 (현지 체류 기간 : 2010년 1월 16일 ~ 2010년 1월 20일) • 방문한 한국 활동가들 : 권미란(HIV/AIDS인권모임나누리+), 백영경(한국여성민우회), 안기종(백혈병환우회), 송현숙(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토리(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 홍지(정보공유연대IPLeft) •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 : Kaushik Sunder Rajan(MIT Prof.), UNAIDS official, Natco社 : MSF(Medicins Sans Frontiers), Lawyers Collective HIV/AIDS Unit, DNP+(Delhi Network of Positive People), AIDAN(All India Drug Action Network), CPAA(Cancer Patients Aid Association), PHM(Peoples Health Movement), NWGPL(National Working Group on Patent Law)1) |
1. 인도의 의약품 접근권 운동
(1) 序
인도는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에이즈 치료제의 90%를, 전 세계 에이즈 치료제의 50%를 공급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항암제, 항생제 등 다양한 의약품을 전 세계에 공급하는데, 그 규모는 세계 제약 산업 전체 생산량의 약 8%에 달한다. 인도에서 생산되는 의약품의 67%가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UN 아동기금이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는 의약품의 50%, 짐바브웨의 경우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은 75%가 인도 산(産)일 정도이다. 때문에 흔히 ‘신의 나라’라고 일컫는 인도는 한편에서는 ‘세계의 약국’으로 불리기도 하다.
인도가 세계 곳곳에 수출하고 있는 약은 대부분 제네릭(generic) 의약품2)이다. 특허 보호 기간이 종료되거나 특허 보호를 받지 않은 의약품을 복제하여 만든 의약품을 말한다. 인도에서 생산하는 제네릭 의약품은 선진국에서 주로 특허로 보호받는 오리지널 신약에 비해 무척 저렴하다. 인도의 풍부한 기술 노동력 등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겠으나, 특허로 보호받는 약이어도 특허권자가 아닌 제3자가 그 약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특허는 존재하되 시장 독점은 어려웠기에 가격은 저절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국제건강행동(Health Action International)과 소비자인터내셔널(Consumers International)의 1999년 보고서3)에 의하면, 위궤양 치료제인 ‘오메프라졸(Omeprazole, 20mg)’의 경우 포르투칼에서 팔리는 오리지널 신약의 가격은 인도에서 생산하는 제네릭 의약품의 가격보다 무려 19배가 비쌌다. 보고서의 조사대상인 16개의 약 중에서는 특허권의 설정 여부에 따라 국가 간 가격 차이가 무려 1:58의 비율로 나타난 것도 있었다.
이처럼 인도의 의약품 시장에서 특허 독점이 형성되지 않은 배경에는 1970년에 제정된 특허법이 존재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는 국내 의약품 수요의 약 85%를 외국계 제약회사에 의존하고 있었고, 의약품 가격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0년에 제정된 특허법은 인도에서 의약품 및 식품과 농약에 대해 인정되는 특허를 제조공정(process)에 관한 제법특허4)에만 한정시켰다. 즉, 약을 만드는 과정이 다르다면 동일한 물질을 복제하여도 특허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국가의 제약업체들은 오리지널 약의 복제약인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하기 위해 특허 독점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나, 인도의 제약업체들은 특허 보호 기간이 만료되기 전이라도, 제조 공정만 달리하여 특허 보호를 받는 오리지널 약과 같은 약을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제품 자체에 대한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은 인도의 특허 제도는 2005년 특허법 개정 전까지 35년 동안 유지되었다.5)
(2) TRIPs 체제의 확립과 인도의 특허법 개정
물질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 특허 제도는 비단 인도만의 경험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의 통상압력으로 인해 특허법 개정을 비롯해, 지적재산권 제도의 전반이 변화했던 1987년 전 까지는 물질 특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가 2005년 특허법 개정을 통해 물질 특허를 인정하게 된 이유는 1995년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그리고 무역관련지적재산권 협정(TRIPs 협정)과 맞물려 있다. WTO 체제 내로 들어온 TRIPs 협정은 회원국에게 이를 자국 내 지적재산권 제도의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최소한의 기준’이라 불리는 수많은 조항 중 인도 정부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TRIPs 협정 제27조 1항6)이었다. 이 조항은 제조공정 뿐만 아니라 물질까지 모두 특허의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는 결국 개발도상국에 대한 의무 이행 유예기간 10년이 끝난 2005년 특허법 개정을 통해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인도의 2005년 특허법 개정은 인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환자․시민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이뤄졌다.7)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가 제3세계 국가들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 값싼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TRIPs 협정의 이행은 협정 발효일인 1995년 1월 1일부터 소급 적용되기 때문에, 물질특허를 인정하게 되면 1995년 이후 특허 출원을 한 의약품은 인도의 제약업체들이 그것의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3) 인도 특허법 개정을 둘러싼 3가지 쟁점
2005년 특허법 개정을 둘러싼 전 세계 NGO들의 투쟁, 그리고 인도 제약 업계의 제네릭 의약품 시장 보호 요구, 무엇보다 인도 내 광범위한 절대 빈곤계층과 이들의 높은 질병 발생률 때문에, 값싼 제네릭 의약품의 생산은 경제적 손익계산을 뛰어넘어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필수적인 안전망이었다. 때문에 2005년의 특허법 개정은 의약품의 독점 생산이 가능한 물질 특허를 인정하는 대신, 이로 인한 폐단을 막을 제도적 보완장치를 담는다.
① Section 25 : 이의 신청 제도
§25(1). Where an application for a patent has been published but a patent has not been granted, any person may, in writing, represent by way of opposition to the Controller against the grant of patent on the ground. §25(2). At any time after the grant of patent but before the expiry of a period of one year from the date of publication of grant of a patent, any person interested may give notice of opposition to the Controller in the prescribed manner on any of the following grounds. |
그 첫 번째는 특허 등록에 대한 사전․사후 이의신청 제도를 둠으로써 특허에 대한 공개 심사 기회를 보장하였다. 등록 전 이의신청(Pre-grant Opposition)은 출원공개 후 특허결정 전에 ‘누구나(any person)’ 할 수 있는 것이고, 등록 후 이의신청(Post-grant opposition)은 특허결정으로부터 1년 이내 ‘이해관계인(any person interested)’이 할 수 있다. 당시 다국적 제약업체와 선진국들은 등록 후 이의신청 제도만을 담을 것을 요구했다.
이의 신청의 요건으로는 발명명세서 상의 오기 및 누락, 우선일자(priority date) 전에 인도에서 널리 알려졌거나 사용된 발명, 전통 지식으로 인정되는 것 등이 해당한다. 인도의 제네릭 제약회사들은 이 조항을 활용하여, 노바티스(Novartis)의 글리벡(Glivec),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의 로수바스타틴(Rosuvastatin), 릴리(Lilly)의 타다라필(Tadalafil), 화이자(Pfizer)의 보리코나졸(Voriconazole) 등에 대해 등록 전 이의신청을 했으며, 이들의 신청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특허 승인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덧붙여, 우리 특허법의 경우 2006년 3월 3일 법률 제7871호로 특허법이 개정되면서 특허이의신청제도가 폐지되고(제69조8) 삭제), 특허무효심판제도에 통합되었는데, 무효심판의 청구인은 이해관계인 또는 심사관에 한한다.(제133조 1항)
② Section 92A :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92A(1). Compulsory licence shall be available for manufacture and export of patented pharmaceutical products to any country having insufficient or no manufacturing capacity in the pharmaceutical sector for the concerned product to address public health problems, provided compulsory licence has been granted by such country or such country has, by notification or otherwise, allowed importation of the patented pharmaceutical products from India. → For the purposes of this section, “pharmaceutical products” means any patented product, or product manufactured through a patented process, of the pharmaceutical sector needed to address public health problems and shall be inclusive of ingredients necessary for their manufacture and diagnostic kits required for their use. |
또 하나는 강제실시 조항으로, 이는 『TRIPs와 공중보건에 관한 각료선언문』(또는 『도하선언문』, 2001)의 이행을 위해 담겨진 것이기도 하다. 개정된 특허법 제92A조에 의해 인도 정부는 특허 받은 의약품을 제조 역량이 없거나 불충분한 나라에 수출을 하기 위해 강제실시를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인도의 Natco社는 2007년 9월 네팔과 우크라이나에 로슈(Roche)의 폐암치료제 타세바(Tarceva, erlotinib)와 화이자의 신장암 치료제 수텐트(Sutent, sunitinib) 등 두 개의 의약품을 수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강제실시권을 신청했다. 이러한 강제실시권 조항을 활용한 나라는 2004년 이래 르완다에 에이즈 치료제를 수출하려 한 캐나다가 유일하다. Nacto사는 특허법 Section 92A는 특허권자의 재판을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실시권 허여 과정에서 특허권자들은 배제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로슈와 화이자는 모두 이 신청에 반대소송을 제기하였고, 재판권은 자연적 정의 원칙에 입각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3(d). the mere discovery of a new form of a known substance which does not result in the enhancement of the known efficacy of that substance or the mere discovery of any new property or new use for a known substance or of the mere use of a known process, machine or apparatus unless such known process results in a new product or employs at least one new reactant. → For the purposes of this clause, salts, esters, ethers, polymorphs, metabolites, pure form, particle size, isomers, mixtures of isomers, complexes, combinations and other derivatives of known substance shall be considered to be the same substance, unless they differ significantly in properties with regard to efficacy. |
③ Section 3(d) : 反에버그리닝(evergreening)
마지막으로 물질 특허를 인정한 2005년 특허법 개정 과정에서, 다국적 제약업체와 선진국의 압력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연대투쟁이 얻은 최고의 성과는 기존에 알려진 물질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발견을 발명으로 볼 수 없도록 하여 특허의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규정, 즉 ‘Section 3(d)’를 담은 것이다.
(4) 글리벡 특허 무효화 소송
‘Section 3(d)’를 둘러싼 갈등의 시작은 2006년 1월 인도 첸나이(Chenni) 특허청의 글리벡(Glivec 또는 Gleevec [성분명 : imatinib mesylate]) 특허 기각 결정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1993년 최초의 표적 항암제인 글리벡에 대한 특허를 각국에서 출원한다. 이후 노바티스는 1993년의 특허를 상품화한 글리벡 베타 결정형(beta-crystalline)을 개발하여, 전 세계 시장에서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다. 인도에서는 1998년에 글리벡 베타 결정형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였고, 2003년 12월 이 베타 결정형에 대한 5년간의 독점 판매권(Exclusive Marketing Rights, EMR)까지 부여받는다. 인도 정부는 TRIPs 협정을 비롯한 WTO 협정 의무 이행을 위해, 협정 발효일인 1995년 1월 1일 이후의 발명에 대해서는 특허를 출원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9)
노바티스의 글리벡 베타 결정형 특허 출원 이전에 인도에서는 이미 10개의 제약회사가 글리벡 베타 결정형의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2003년 당시 인도에서 노바티스가 판매하는 글리벡의 한 달 약값이 2,667달러였던 반면, 글리벡의 제네릭 의약품은 89~267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바티스의 독점 판매권 획득, 그리고 2005년 이후 물질 특허가 인정됨에 따라 인도 내 다수의 회사들이 제네릭 의약품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에 인도의 암환자단체인 CPAA(Cancer Patients Aid Association)와 법률가 단체(Lawyers Collective HIV/AIDS Unit), 그리고 글리벡의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하는 인도의 제약 업체들은 노바티스의 글리벡 독점판매권과 특허 신청에 맞서 싸우게 된다. 2005년 CPAA는 노바티스의 글리벡 베타 결정형 특허에 대해 이의 신청(Pre-grant Opposition)을 하게 되었고, 첸나이 특허청은 2006년 1월 인도 특허법 ‘Section 3(d)’를 근거로 노바티스의 글리벡 베타 결정형 특허 출원을 기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의 특허법은 1995년 1월 1일 이후에 처음으로 승인된 특허만 인정을 하는데, 노바티스가 특허 출원한 글리벡 베타 결정형은 1995년 이전에 이미 알려진 물질, 즉 1993년에 개발된 최초의 글리벡을 약간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허권을 부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인도 특허청의 결정은 인도 특허법 ‘Section 3(d)’의 취지가 특허를 이용한 시장 독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대표적인 특허 남용 행위인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을 막기 위한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의약품의 사소한 변형물에 해당하는 의약품에 대해 특허를 인정할 경우, 질이 낮은 특허의 무분별한 양산과 이로 인한 ‘특허의 확장(patent extensions)’ 효과를 야기한다. 그 결과 한 사회의 보건 의료 영역은 공공의 통제에서 벗어나 기업의 이윤 축적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그 폐단은 고스란히 그 사회의 구성원 특히 빈곤계층과 환자들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때문에 인도 특허청의 결정은 인도 내 환자들과 제약 업체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생산되는 약을 먹는 각국의 환자들과 NGO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2006년 5월 노바티스는 특허청의 결정에 대한 불복, 그리고 인도 특허법 Section 3(d)의 TRIPs 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지적재산권 항소 위원회(Intellectual Property Appellate Board, IPAB)와 마드라스(Madras)10)고등법원에 각각 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마드라스 고등법원과 IPAB는 각각 2007년 8월과 2009년 6월에 노바티스의 소송을 모두 거절한다. ‘Section 3(d)’의 TRIPs 협정 위반에 대해 마드라스 고등법원은 인도 국내법이 국제 무역조약에 맞는지를 판단할 사법권(jurisdiction)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 그리고 첸나이 특허청의 글리벡 특허 거절 결정에 대해서 IPAB는 글리벡 베타 결정형의 혁신성 부족과 높은 약가를 지적하면서 “그러한 높은 독점가를 지지하도록 허용하는 특허는 공공질서(public order)에 반한다.”라는 판결을 내렸다.11) 하지만, 이에 불복한 노바티스는 2009년 8월 결국 인도 대법원에 Section 3(d)의 해석을 구하는 소송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2. 지적재산권에 대한 대항 담론과 구체적 기획들
(1) 투쟁의 지형 : 특허화(사유화)에 대한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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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Life Cycle |
의약품 접근에서 발생하는 문제 |
시판 이전 |
1. 연구개발 |
• 개발 외면 • 특허로 인한 사유화 |
2. 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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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 이후 |
3. 가격결정 |
• 특허 독점을 이용한 고가 유지 • 공급 제한 |
4. 공급 |
위의 표12)에 따르면, 인도에서의 환자․시민 단체들과 노바티스는 갈등은 약이 시장에 공급되기 전 단계, 즉 가격이 결정되기 이전의 지형에서 ‘허가 단계’, 즉 ‘특허化’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2002년 글리벡 투쟁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투쟁은 특허化가 완료되어 약이 이미 시장에 공급된 이후 가격 결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양국 간 특허 제도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다. 특허에 대한 폭넓은 이의 절차의 보장 여부 및 특허성을 판단하는 기준의 차이 등은 의약품 접근권 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또한, 의약품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미의 차이와 제약 산업의 인프라의 차이 역시 다른 경로의 운동을 만드는 배경이 된다.
인도가 일반 의약품 생산에 강점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도의 풍부한 기술 노동력 때문에 의약품 생산단가가 선진국과 비교 시 30~40% 가량 저렴하다는 점이다. 2001년 미국에서 탄저병 테러가 문제가 되었을 때 탄저병 치료제인 바이엘(Bayer)社의 항생제 시프로(ciprofloxacin) 대용으로 같은 효능을 가진 인도산 일반의약품 공급이 검토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미국 내 시프로의 가격은 1정당 1.83달러인데 반해 인도의 제네릭 의약품은 500정에 12센트여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인도는 저가의 노동력이 가능한 중국 등 여타 개도국과 비교할 때에도 화학 및 화학가공처리 분야가 매우 발전되어 있고 우수한 기술 인력과 영어구사 가능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 일반 의약품 제조에 큰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강점을 배경으로 인도는 다량의 일반의약품을 인도 국내시장 및 해외 시장으로 수출하고 있다. 또한, 인도 사회에서 일반 의약품 문제는 이러한 경제․통상 이슈 이상의 엄청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도가 최근 연 9%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아직도 총 인구의 34.7%(약 3억7천 만명) 이상이 하루에 미화 1달러 이하로 사는 절대 빈곤 인구이고, 또 낙후된 위생시설과 각종 질병의 빈발로 5세 미만 영아의 사망률이 1,000명당 85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빈곤층과 높은 질병 발생율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값싼 일반 의약품을 공급하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논리로 대응하기 어려운 사회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13)
(2) 대항 담론 :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국제적 논의들14)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소송 및 투쟁들은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국제적 대항적이며 대안적인 흐름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다. 아래 기술할 국제적 논의들은 각국에서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운동의 흐름과는 괴리가 있지만, 개별 운동에 대한 평가의 기준 및 앞으로의 전략 모색을 위한 참고 자료로써 유효하다고 판단된다.
① 2001년 도하 선언문 채택
1995년 TRIPs 협정의 발효 이후, 선진국 중심의 지적재산권 제도 개편과 강화 흐름에 따른 부작용들이 누적되면서 이에 대한 비판들이 제3세계 국가의 정부들과 국제 NGO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의 비판은 독점에 따른 여러 피해 사례들의 고발과, 지적재산권의 유인효과(incentive)론에 대한 회의 등이 주를 이뤄왔으나, 2000년대 이후 지적재산권 제도 대항 담론의 구성으로 진전되었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대항 담론이 국제적 논의에서 공식화 된 계기는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WTO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트립스(TRIPs)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선언』이다. 142개 WTO 회원국의 절반이 넘는 80여개 국가들은 선언을 통해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 확보를 비롯한 공공의 건강 보호가 제약회사의 특허권 보호보다 중요”함을 밝힌다. 이후 “공공의 건강”, 즉 ‘공공영역의 보장’과 ‘인권의 보호’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대항 담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② WIPO의 Development Agenda 논의 : 공공영역의 보장
2003년 국제 NGO와 개발도상국 정부들은 TRIPs 협정 발효 이후 지식이라는 공공재의 사유화가 낳은 폐해를 지적하며,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서 지적재산권 제도와 공공정책과의 관련성을 논의할 것을 촉구한다. WIPO가 UN 산하의 전문기구로서, 그 임무 역시 지적재산권의 보호에만 매몰되지 않고, UN의 설립 목적에 기여하는 것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WIPO내에서 3차례의 정부 간 회의와 4차례의 위원회 회의 등을 거쳐, 2007년 9월에 열린 WIPO 총회에서 지적재산권 보호와 공공의 이익 사이의 공정한 균형과 공공영역의 촉진을 위한 규범 제정 활동 등에 관련된 45개의 제안이 채택되어, 이를 실행할 위원회(CDIP, Committe for Development and Inteleectual Property)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③ CESCR의 『일반논평 17』 발표 : 인권의 보호
UN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이하 사회권 위원회) 역시 2005년에 지적재산권과 인권에 관한 매우 중요한 해석 기준을 발표하는데,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제15조 1항 (c)호에 관한 『일반논평(General Comment)』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권 위원회가 발표한 『일반논평 17』은 지적재산권 제도에서 인정하는 법적권리는 ‘저자의 권리’를 비롯한 기타 인권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며, 주로 기업의 이익과 투자를 보호하는 이러한 법적 권리는 일시적이며 철회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저자의 권리’에 의하여 보호되는 물질적 이익이란 저자가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과 그러한 ‘저자의 권리’는 문화와 과학에 대한 권리 및 다른 인권에 의하여 제한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발명의 상업화가 생명권, 건강권 및 사생활보호 등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의 완전한 실현을 위태롭게 할 경우 이러한 발명을 특허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반하는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의 이용을 방지하여야” 함을 명시한다.
3. 소결 : 국내의 의약품 접근권 운동 평가
인도의 한 활동가가 한국의 스프라이셀 투쟁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 약이 글리벡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알아보았으냐? 그 약의 특허는 타당했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한국에서의 의약품 접근권 운동이 그간 놓치고 있던 부분을 지적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즉, 국내의 의약품 접근권 운동은 의약품에 전유(專有)되는 유일한 권리이자 제도인 특허를 넘어선 새로운 권리(인권 의제의 도입)와 제도(공공영역의 확보)를 도입하려는 데에는 소홀했다고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의 의약품 접근권 활동의 주된 전략이었던 강제실시 청구라든가 약가 결정 과정에 대한 개입이란, 생명과 건강이라는 권리가 지적재산권보다 우선한다는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즉, 국내에서 의약품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에 대한 비판 담론은, 피해 사례를 고발하며, 권리자들의 양해, 또는 그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시키는 영역에서만 이뤄지고 있으며15), 결국 그 제한된 영역에서 국가와 자본이 최대한의 역할을 다 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이 밝히듯이, 지적재산권은 저자의 권리를 비롯한 다른 기본권에 우선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권리 자체의 특성이 이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를테면, 특허법에 따르면 독점을 보호받는 기간은 ‘특허를 출원한 이후 20년’이다. 각각 20년과 50년으로 설정된 특허와 저작권의 보호기간은 지적재산권을 보통의 기본권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지적재산권은 예술가의 창작품과 과학자의 발명은 모두 사회가 그에게 제공한 문화와 과학기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제 하에 그들의 활동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써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보호기간을 두어 지적재산권의 행사에 제한을 두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도는 시대적 상황 즉, 현실의 권력관계와 지배적인 담론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인데, 전 세계적으로 특허 보호기간을 20년으로 통일시킨 것이 바로 TRIPs 협정이다. 1987년 이전 국내에서 특허 보호기간은 12년이었으며, 미국의 경우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이하 TRIPs 협정) 발효 이전 특허 보호기간은 17년이었다. 다시 말해, 지적재산권이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소유권처럼 여겨지는 일은 불과 십 여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무척 최근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아직 운동 내에서도 보편화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중심으로,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프로그램의 구축과 실현에 방점을 찍다보니, 특허 문제 자체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된 측면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전략에서 벗어나서 약이 공급되기 이전의 과정에 개입하자는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지금까지 가격 결정 이전의 지형에서도 ‘특허化’ 이전의 영역 즉 ‘연구-개발 과정’에 대한 개입으로 고민되었다.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Fuzeon)의 강제실시 청구 과정에서 밝혀진 국내의 연구-개발 사례에서 보듯이, 분명 ‘연구-개발 과정’의 공공성 확보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운동의 과제로 연계하는 것은 현실적 난망함이 있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의 정의 또는 그 범위의 설정 문제가 존재했으며, 또한 의약품의 연구-개발 과정이라는 것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운동으로서의 매개점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연구-개발에 대한 논의라는 것이 외국의 문헌에 대한 세미나, 혹은 선진국에서 진행되는 여러 협상들에 대한 공부를 하자라는 결론으로 내려졌으나, 의약품 접근권 운동이 늘 당면하는 긴급한 현실에는 부응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전 세계적인 의약품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다루는 국제적 논의들이 배타적 재산권 즉, 특허가 아닌 또 다른 권리나 대안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빨갱이’ 소리나 듣는 형편이다.
물론, 국제적 논의가 운동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들이 각 국가마다 개별적 흐름에 직접적인 상관성이 낮기는 하지만, 이들 논의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국가들과 NGO들의 연대가 점점 그 위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WIPO 개발 의제 자체가 이들의 발언력으로 인해 탄생했다는 점, 그리고 『일반논평 17』의 각 사례들이 개별 국가에서 발생한 운동의 성과물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 무엇보다 이러한 대항적이고 대안적인 흐름들이 2005년 인도 특허법 개정 과정과 글리벡 특허 무효 소송에 이르는 과정에 성공적으로 개입한 것들을 살펴볼 때, 이러한 국제적 논의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재 글리벡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Lawyer Collective가 UN 체제 내에서 진행 중인 이러한 논의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논의들이 이끄는 긍정적 변화들을 국내 실정에 맞게 하는 것이 운동의 과제라면,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1) 한국 활동가들과 인도의 활동가 및 환자단체들이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크게 ⅰ) 양국의 의약품 특허 관련 법제도적 쟁점, ⅱ) HIV/AIDS 감염인 인권 문제, ⅲ)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글리벡 접근권 투쟁이었다. 이 글은 이 세 가지 주제 중 양국의 글리벡 투쟁과 법제도적 쟁점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음을 밝힌다.
2) 보통 ‘일반의약품’ 혹은 ‘카피(copy)약’이라고도 번역한다, 그러나 일반의약품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판매 시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Ethical Drug)’과 비교되는 뜻(Over-the-counter Drug)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특허의 보호 여부를 따지는 본래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 카피약 혹은 복제약은 의미 전달은 쉬우나, 용어에 대한 국내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사용을 지양하자는 의견도 있다.
3) K. Bala and Kiran Sagoo, “Patent and Prices”
(출처 : http://www.haiweb.org/campaign/novseminar/bala1.html)
4) 보호기간은 등록일로부터 5년, 출원일로부터 7년.
5) 이 단락은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통상법률』통권 제74호(2007년 4월) pp.142-173에 실린 <인도의 의약품 특허제도와 TRIPS 규범>(김희상)에 실린 내용 일부를 발췌 및 요약하였다.
6) §27(1). 제2항 및 제 3항의 규정을 조건으로 모든 기술 분야에서 물질 또는 제법에 관한 어떠한 발명도 신규성, 진보성 및 산업 상 이용가능성이 있으면 특허획득이 가능하다. 제65조제4항, 제70조제8항 및 이 조의 제3항을 조건으로 발명지, 기술분야, 제품의 수입 또는 국내생산 여부에 따른 차별 없이 특허가 허여되고 특허권이 향유된다.
7) 당시 국내에서도 인도 특허법 개정 반대 활동이 벌어졌다. 2005년 2월 25일 HIV/AIDS감염인인권모임나누리+는 인도 특허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인도대사관 앞에서 진행했다. 또한, 국내 보건의료단체 및 HIV/AIDS 감염인 단체를 중심으로 인도 수상 및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활동 등이 펼쳐졌다.
8) 제69조(특허이의신청) ①누구든지 특허권의 설정등록이 있는 날부터 등록공고일후 3월이 되는 날까지 그 특허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한다는 것을 이유로 특허청장에게 특허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특허청구범위의 청구항이 2이상인 때에는 청구항마다 특허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9) 1996년 11월 미국은 인도를 TRIPs 협정 제70조 8항과 9항 위반으로 제소한다. WTO 패널은 미국 측 주장을 받아들여 1998년 8월 인도의 TRIPs 위반 판정을 내린다. 그에 따라 인도는 1999년 3월 특허법 개정을 통해, TRIPs 협정 제70조 8항, 소위 ‘Mail Box’조항에 따라 유예기간 중에도 특허대상이 되는 발명에 대해서는 특허를 출원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동 협정 제70조 9항에 따라 특허출원을 하고 판매 허가를 받은 발명에 대해서는 5년 간의 EMR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EMR은 유예기간에만 인정되는 것으로 2005년 개정된 특허법이 물질 특허를 인정하는 시점까지 허용되었다. 노바티스가 물질특허를 인정한 2005년 특허법 개정 이전에 글리벡 베타 결정형에 대한 특허 및 독점 판매권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10) 인도 첸나이 지역의 옛 이름
11) 약사신문 2009. 7. 7
12) 정소원(2008).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13) 이 단락은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통상법률』통권 제74호(2007년 4월) pp.142-173에 실린 <인도의 의약품 특허제도와 TRIPS 규범>(김희상)에 실린 내용 일부를 발췌 및 요약하였다.
14) 이 단락은 IPleft 운영위원회에서 발표된 paper인 <지적재산권의 강화 경향>(양희진, 2010)의 내용의 일부를 발췌 및 요약하였다.
15) 양희진(2009), <정보문화향유권과 저작권>, 국가인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