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코드와 공개사회: 인터넷 거버넌스의 가치
Open Code and Open Societies : Value of Internet Governance
Lawrence Lessig
신동룡 역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역주1)는 법률가이자 아마추어 수학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친구의 책에 추록으로서, 그것도 익명으로 게재된 것이다. 논문을 출판하기 전에 페르마는 당시의 수학자들이 공개적으로 연구하였던 문제들에 심취되어 있었다. 1630년, 그는 아버지의 \’디오판투스의 정수론\’ (Diophantus\’ Arithmetica) 가장자리에 "2보다 큰 모든 자연수 n에 대해 Xn + Yn = Zn의 자연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난해한 공식 옆에 다음과 같이 휘갈겨 썼다. "나는 참으로 신기한 증명을 발견하였지만, 그 증명을 여기에 적기에는 책의 여백이 너무 모자란다."
페르마가 정말로 증명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페르마가 천재적 수학자이었든 아니었든, 그는 확실히 자기 스스로를 유명하게 만드는 천재적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페르마를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수수께끼였기 때문이다. 거의 사백년 동안, 세계에서 내노라는 수학자들이 페르마가 기록하지 않은 증명을 밝혀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끝내 실패하였다.
1990년대 초, 어렸을 때부터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심하였던 앤드류 와일즈(Andrew Wiles)라는 사람이 드디어 자신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ermat\’s Last Theorem)를 해결하였다고 자신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인터넷에 띄워 놓았다. 그러나 바로 얼마 후에 증명에 약간의 문제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증명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와일즈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해결하였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증명기록은 회수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인터넷이라는 대기공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일즈의 증명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비록 완벽한 증명에 이르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하였다. 넷 상에서 증명기록이 여기저기 수없이 교환된 후에 드디어 미완성된 와일즈의 증명이 해결되었다. 마침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해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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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어떤 사람들은 자유소프트웨어운동(Free Software Movement-설립자 리차드 스톨맨이 설명하듯이, 여기에서의 \’free\’는 무료맥주(free beer)에서의 무료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free speech)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개소스소프트웨어운동(Open Source Software Movement)이라고 일컫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양자의 차이는 중요하지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양자는 모두 인터넷을 관리하는 기본소프트웨어가 공개소프트웨어인 세상, 즉 모든 사람들이 코드의 소스를 획득·수정·개선할 수 있는 세상을 목표로 한다.
공개코드를 지지하는 근거는 상이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코드를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개코드가 효율성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개사회의 성과물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개발되어 만들어지는 코드는 소스가 알려지기 때문에 결점이 밝혀지고, 개선될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폐쇄적인 생산과정에서 산출되는 코드보다는 더 강력하고, 더 효율적이며, 더 확실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더 훌륭한 코드가 약속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컴퓨터가 이탈리아의 전기만큼 확실한 곳에서 이것은 정말 매우 귀중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나는 공개코드의 효율성을 논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공개코드의 가치이다. 당신이 곧 관심을 가지게 될 나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그리고 일반적으로, 거버넌스(governance)에역주2) 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교훈을 줄지 모르는 공개소스운동 또는 자유소프트웨어운동의 가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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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넷 거버넌스라는 말은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인터넷은 매우 복잡하게 뒤섞인 도서관들에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기괴한 텔레비전이다. 여기서 인터넷 거버넌스에 관해 논의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거버넌스를 정의하고자 한다. 만약 당신이 월드와이드웹(WWW)에 서버를 연결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인터넷 등록기관, 정확히 말해 네트워크 솔루션(Network Solutions)이라는 회사에 등록을 하고 도메인네임을 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절차는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거버넌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당신이 WWW에 있는 웹사이트에 연결하고자 한다면, 당신의 컴퓨터는 웹 상의 컴퓨터가 당신의 컴퓨터를 찾을 수 있도록 웹사이트에게 당신의 IP주소를 전송할 것이다. 이 프로토콜도 역시 내가 정의하는 거버넌스의 산물이다. 당신이 IP주소를 가지고 웹사이트에 연결할 경우, IP주소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IP주소는 정적이라기보다는 동적이다. 또한 상대방이 당신의 실체에 관한 그 어떤 정보를 알아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IP주소는 실체적(real)이라고 보다는 대략적(proxy)이다. 이것 또한 내가 의미하는 거버넌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각각의 사례에서 언급된 거버넌스는 인터넷 상에서의 특정 구조(architecture)로부터 형성된 거버넌스이다. 코드 디자인은 넷 상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IP주소를 사용한다. 물론 다른 디자인이 선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코드 디자인은 사이트에 연결하기 위해 오직 IP주소만을 요구한다. 만약 더 높은 보안이 필요하였다면, 다른 디자인들이 채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내가 의미하는 거버넌스는 코드를 통하여 발생하는 거버넌스다.
그러나 확실히 말해 거버넌스는 단순히 코드가 아니다. 네트워크 솔루션사를 도메인네임 등록기관으로 선정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작고한 존 포스텔(John Postel)과 인수계약을 맺은 미국정부가 네트워크 솔루션사를 선정한 것이다. WWW을 위한 프로토콜을 정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이 디자인이 통용되도록 추천하고, 그것을 선택된 것으로 공식 인정하였던 것은 인터넷 결정가(Internet decision-makers)그룹이었다. 이 결정자들은 사람들이었고, 그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시민들\'(People)에게 책임을 진다. 그들의 이름은 Hal 2000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거버넌스는 코드의 규제와 이 코드를 규제하는 조직체가 행하는 규제, 양자의 혼합이다. 간단히 이것은 기계와 사람이다.
그러나 이 규제자들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규제를 한다. 두 개의 규제자들은 서로 구별된다. 또한 그것들은 현실공간의 정부가 규제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우리는 이 차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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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코드와 코드가 규제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자. 법률가는 코드가 규제하는 방식에 대해서 그리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법이 규제하는 방식에 있다. 법률가에게 있어 코드는 단지 법이 규제하는 하나의 배경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인터넷이든 그 안의 넷이든, 넷 공간을 확정하고 구성하는 것은 바로 사이버스페이스의 코드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코드는 헌법과 마찬가지로, 자체 내에서 일련의 가치와 삶을 지배하는(govern) 가능성들을 형성한다. 1995년의 인터넷에서는 신원확인이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당시의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을 보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인터넷에서는 신원확인이 아주 용이해 질 것이다. 상거래는 인터넷이 그러한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이 필수적으로 보호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은 하나의 가치이다. 그러나 코드의 디자인으로 인하여 이러한 가치들이 보호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이 코드를 고안한다는 것이다. 기술자 즉, 엔지니어들은 세상이 어떻게 될 지를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자들은 지배자들(governors)이다.
마치 인터넷에서의 한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수개월 동안 나는 코드가 왜 법의 일종인지, 코드 제작자들이 어떻게 규제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왔었다. 이러한 입장은 분명 우리가 이 규제자들이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인터넷 구조(architecture)가 비트(bits) 뿐만 아니라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러니까 구조가 만약 법의 일종이라면, 입법적 맥락과 같이 우리는 누가 이 법을 만들고 그들이 어떻게 이 법을 만드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만약 코드가 가치를 반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프라이버시·표현의 자유·익명성·정보접근과 같은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도출되는 가치들을 확인해야만 한다. 또한 만약 코드가 정말로 가치를 갖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이 코드가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도출되는 가치들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헌법적 전통의 구조를 존중해야 하고, 이 구조로부터 헌법적 전통에 의해 구조화된 가치들을 끌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거버넌스가 코드에 의해 이루어지든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든, 이러한 가치들을 인터넷 거버넌스의 세계에서도 실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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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리글(Joe Reagle)은 W3C(World Wide Web Consortium)의 연구원이다. W3C는 넷의 표준과 프로토콜을 연구하는 인터넷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다. 리글은 젊은 연구가이며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버크만센타(Berkman Center)의 특별연구원(fellow)이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터넷을 이용한다. 그는 아주 규칙적으로 머리를 염색하기 때문에 그의 참모습을 잘 떠오릴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기술정책(techno-policy)분야에서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괴짜(geek)이다. 그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의 견해를 들었다. 그런 그가 최근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우리의 헌법 전통에 내재된 가치에 대해서 가르친다. 당신은 우리가 이 가치들을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터넷의 전통 안에 내재된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는가? 말하자면 인터넷이 관리되는(govern) 방식 속에 함축된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것들을 확인하고, 그것을 현실공간으로 가져가면 안 되는가?
나는 그의 생각에 동감했다. 언제나 제국주의자이며 언제나 법학자인 나는 현실공간이 사이버스페이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만 입각하여 연구하였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없을까? 현실공간이 넷 거버넌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강의를 통하여 리글의 의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답변을 시도하려고 한다. 즉 인터넷 거버넌스 내에 어떠한 가치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이 전통으로부터 점점 증가하고 있는 공개소스소프트웨어운동과 미래의 넷 거버넌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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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공개소스에 대해 조금만 더 논의하여 보자. 나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였던 와일즈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만약 당신이 공개소스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모델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어떤 다른 것과 연결시키지 못해 이해하기 힘들다면, 또는 당신이 소위 법학교육이라는 것에 완전히 고착되어 있어서 공개소스가 가지고 있는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면, 와일즈의 증명에 관한 모델을 기본틀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공개소스소프트웨어의 작동방식-어떤 특별한 착상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불완전하지만 가망성이 있는 형태를 공공에게 넘겨주면, 공공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후, 해결 작업을 계속 진행한다. 그러나 이 생산물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생산물은 다시 가망성을 유지한 채 이 공개된 부분을 다시 공개된 채로 남겨둔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GNU/Linux라는 운영체제는 아주 적절한 예이다. 여기에서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라는 필란드 청년은 페르마의 역할을 한다.
리누스 토발즈는 법률가는 아니다. 또한 나는 그가 아마츄어 수학자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는 헬싱키대학교 대학생이었던 1991년에 운영체제의 커늘(kernel)을 작성한 후, 그것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겨우 10k lines 크기의 파일이었다. 커늘이 암시하는 바대로 이것은 운영체제와 연결되는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리누스의 화두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리누스의 커늘을 받아들였고 그것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리누스가 간략하게 기술한 증명을 구체화시킨 후, 그것을 리차드 스톨맨의 GNU 운영시스템에 링크시킴으로써 그것을 운영체제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커늘을 받아들임으로써 데스크탑 운영체제의 지배자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아성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유일한 것으로 평가받는 운영체제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단순히 나의 편견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내부문건인 할로윈(Halloween) 문서는 GNU/Linux와 공개소스소프트웨어운동에 대하여 "이것들은 가까운 시기 내에 윈도우NT로부터의 수입을 엄청나게 위협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장된 바가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원자들의 집단적 노력을 통하여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운영체제 중의 하나가 개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다. 마이크 고드윈이 인터넷 보고건설(internet barn-raising)이라고 묘사하였던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산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단순히 운영체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드윈이 자세하게 열거한 바대로, GNU/Linux가 만들어진 것과 유사한 수많은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공동의 문제가 공동의 공간에 놓여지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GNU/Linux가 성립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년 전부터 이 프로젝트의 기초작업이 진행되었다. 사실 토발즈가 작성한 커늘은 1985년 이래로 발전해 오고 있었던 기본구조에 결합된 것이었을 뿐이다. 이 기본작업은 리차드 스톨맨과 그의 자유소프트웨어운동에 의해 진행되었다. Unix를 독점화 하겠다는 AT&T의 결정에 대해 분개했던 스톨맨은 수천의 넷 보고건설자(Net barnraiser)를 이끌었던 것과 유사한 프로젝트를 착수하였다. 프로젝트는 GNU 운영체제를 목표로 하였지만, 커늘이 없었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토발즈가 GNU와 GNU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던 툴(tool)을 가졌었기 때문에 리눅스를 GNU에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다른 것 위에 세워짐으로써 GNU/Linux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공개소스소프트웨어의 이념 또는 이상은 GNU/Linux 운영체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넷을 작동시키는 수많은 핵심기술들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공유자산화 시킨다. 다시 말해 자신이 만든 것을 보상 없이 포기한다는 이러한 이념 또는 이상은 완전히 60년대적이며 이상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맑스가 코드에 적용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에 낯선 이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과 그것의 발전방식을 검토한다면 그리 낯설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초과학은 공개소스소프트웨어의 이념과 매우 똑같은 방식, 즉 발전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넷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게 된다면, 그리 이국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공산주의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사실 대부분의 인터넷, 확실히 우리 대다수가 관계되어 있는 인터넷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공개소스이다. 또한 인터넷의 성장은 공개소스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여기서 잠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20세기 후반 이래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지난 30년 전부터 컴퓨터 네트워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 텔레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주로 독점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 네트워크들은 코드와 프로토콜을 사적으로 소유하려는 의도 하에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네트워크 자체는 사적 소유물이었다. 따라서 네트워크의 성장은 극히 미비하였다. 비용은 높았고, 사용자의 참여도 저조하였다. 그리고 영향력있는 단 한 명의 행위자가 네트워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른 모델을 기초로 세워졌다. 인터넷이 큰 대학교의 연구모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 연구모임에게 맡겨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1984년에 전화선을 통제하였던 AT&T의 독점을 정부가 무너뜨리고 난 이후에, 비로서 인터넷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단 AT&T의 독점이 무너지고 난 후에 연구자들은 인터넷을 지배(govern)하게 될 일련의 프로토콜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프로토콜은 공공적이었다. 이것들은 공유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소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누구나 이 공동의 코드를 증진시키는 조직체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누구나 이 프로토콜을 자유롭게 얻었고, 이것에 기반하여 응용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갔다. 바로 이것이 고드윈의 용어를 빌린다면 오늘날의 넷을 만든 보고의 건설이었다.
인터넷 최대의 서버인 무료 아파치 서버에서부터 대부분의 이메일을 전송하는 SENDMAIL 프로토콜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핵심 소프트웨어는 이러한 의미에서 보고건설을 위한 코드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예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일 것이다. 웹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프로토콜-언어-는 HTML과 HTTP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공적 표준이고 공적 프로그램 언어인데, 공공의 사용을 위해 개발되었고 공공에게 제공되었다. 마찬가지로 BASIC과 C++ 언어 또한 이런 의미에서 공적이다. 그러나 웹은 훨씬 더 공적이다. 왜냐하면 코드 또는 언어가 공적이고 누구나 자유롭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코드의 특수한 사용 또한 공적이고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C++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면, 그것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웹 페이지에서 브라우저의 \’소스보기\'(reveal source)를 실행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영어)로 보일 것이다. 소스는 항상 볼 수 있다. HTML소스는 공적이다. 그것은 공유물이고, 누구나 그것을 얻을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최소한, 브라우저들은 누구나 재료를 얻거나 복사·수정·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소스를 공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네트워크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코드를 통하여 구축된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공공에게 제공되는 비독점적·공적 영역이 재산개념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전무후무한 우리경제의 최대의 성장을 가능케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의 한 기술자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터넷은 공개소스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공개소스소프트웨어에 대해 무척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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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 리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리글은 넷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리글은 이 디자인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내가 그에게 우리는 우리의 헌법과 함께 해야만 한다고 설명하였던 방식대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다시 말해 이 가치들을 확인하고 그것들이 이끌고 있는 가치를 이해하도록 해 보자.
리 글의 첫 번째 가치는 일종의 무정부주의다. 넷은 어떤 조직화된 권력체계를 통하여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의 통제(bottom-up control)를 통하여 움직인다. 넷 창시자인 데이브 클락(Dave Clark)이 설명하였듯이, "우리는 왕이나 대통령도, 투표도 거부한다. 우리는 미완성된 공감대와 끊임없이 작동하는 코드(rough consensus and running code)를 믿는다."
어느 정도 부유한 계층인 우리 법률가들에게 이것은 전도유망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혼돈(chaos)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기술-무정부주의자들(techno-anarchist)은 즉시 우리가 무정부주의를 나쁜 것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려고 할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규칙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통제를 뜻한다.
어쨌든 나는 넷의 본질에 관해 이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기술자가 정치이론에 대해 말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있다. 그들이 하는 것 속에 함축된 가치-말하자면, 그들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가와 같이 그들의 행동으로부터 알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흥미진진한 넷 세상의 독특한 모습이다.
그리고 리글의 설명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 거버넌스의 관행(practice)에서 중심적인 두 개의 가치, 첫째 공개소스운동과 연결된 가치들, 둘째 현실공간에서 거버넌스와 연결된 가치들이다. 나는 이 두 개의 가치에 대해 논의한 후, 그것을 현실공간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연결시킬 것이다.
공개발전(Open-Evolution)
첫 번째 가치를 공개발전의 가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플랫폼 또는 프로토콜이 수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 신을 끌어들이지 말아라. 유일한 발전경로를 설정하지 말아라. 플랫폼 또는 프로토콜 안에 그것의 사용을 간섭할 수 있는 중간매체를 만들지 말아라. 중심핵(core)을 단순하게 하되, 애플리케이션(또는 엔드(end))은 다양하게 발전되도록 해라. 부분적으로 인터넷 관리자들(governors)은 정치철학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들(liberals)이기 때문에, 공개발전은 인터넷 거버넌스의 관행으로부터 도출된다. 관리자들은 어느 누가 넷에 어떠한 목적을 부여하였던지 그 목적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이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넷이 하나의 특정방향으로 편향되지 않는 활동양식(modus vivendi)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중립성을 보존하기 위해 시스템이 유지해야만 하는 원칙들이 있다. 하나는 MIT공대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엔드-투-엔드(end-to-end)라고 불리는 네트워크 디자인의 이념이다. 이것의 기본적인 생각은 "도관(conduit)은 일반적이어야 하지만, 프로젝트의 끝에는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제롬 잘쩌가 설명하였듯이 그것은 "고객에게 어떠한 서비스, 형태 또는 제한도 강요하지 않는다. 고객의 애플리케이션은 그 자체가 어떠한 특징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특징 그 자체를 제공해야할지 안 할지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엔드-투-엔드 디자인을 통하여 네트워크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 지는가에 대해 중립적이다. 애플리케이션이 인터넷 프로토콜을 따르는 한 그것은 넷에서 작동할 것이다. 제작자는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키기 위하여 허가를 얻을 필요가 없다. 디자이너들은 넷의 소유자들이 그들을 배신할 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넷은 사용에 대해서는 중립적으로 구조(architecture)화 되었다. 이것은 사용자들이 무엇을 요구할 지라도 넷이 발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엔드-투-엔드는 인터넷의 구성원칙이다. 나는 이것이 인터넷의 엄청난 발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발전하는 넷의 자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생각이다.
이것은 변조의 이념(ideal of modularity)이다: 코드는 무수한 방식으로 작성될 수 있다. 좋은 코드(good code)는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도 작성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코드(Good code)는 변조 가능한 코드이자, 그것의 기능과 매개변수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코드이다.
왜 그러한가? 탁월함(virtue)은 효율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좋은 코드(good code)만이 작동할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명한 변조는 코드의 변조를 가능케 한다. 즉 그것은 어떤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대체 가능하도록 한다. 게다가 코드는 공개적이다. 코드는 변조적이다. 큰 덩어리(chunks)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 제거되고,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코드가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방향과 방식들이 가능하다. 어떠한 사람도 코드가 발전하게 될 방식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리글이 의미하는 무정부주의다. 어떠한 규칙도 그 방식이 옳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시장의 발전이 그것을 한다. 여기서의 발전이란 수천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코드를 개선시키려고 하는 것이며, 그 사람들이 의미있는 개선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내가 공개발전 디자인이라고 일컫는 이러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디자인 자체의 요소로 인하여, 어떠한 사람도 시스템이 어떻게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시스템이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 경우 넷 디자인은 이러한 \’아래로부터 위로\’라는 관행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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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연결을 할 수 있다. 공개발전의 이상을 독점금지법의 묶어팔기(tying)에 연결시켜 보자. 묶어팔기 원칙에 따르면 판매자는 어떤 경우 특정한 상품을 판매할 때 다른 상품을 끼워팔 수(bundling) 없다. 판매자가 두 개를 함께 똑같이 판매할 지라도, 판매자는 두 개를 분리하여 판매해야만 한다. 법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묶는(tying) 상품에 대한 시장지배력을 갖춘 판매자만 철저하게 조사되어야 하는지, 묶여지는(tied) 상품에 대해 시장지배력의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이 철저하게 조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규칙에 적용되는 판매자가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 규칙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즉 마치 공개발전과 같이, 이것은 오직 시장에서의 결정을 통하여 개별적 상품, 시장 또는 일련의 상품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묶어팔기의 법은 결정권한의 규칙으로 기능할 것이다. 통제 또는 강제의 위협이 강력할 때, 법은 시장의 결정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공개발전과 같다. 왜냐하면 공개발전은 시장, 말하자면 이러저러한 특정한 방향으로 웹을 확장하는 개발자들의 시장에서 웹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관해 결정된 바를 보장하도록 의도된 원칙이기 때문이다. 왕도, 대통령도 그리고 투표도 없는 오로지 공감대와 끊임없이 작동하는 코드만이 존재한다.
두 번째 연결은 공개발전의 가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민주주의 가치라 함은 민주적 시스템이 민주주의가 선택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적 권리를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결코 다른 것들을 제처둔 채 오로지 하나의 경로 또는 하나의 정당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하나의 경로 또는 하나의 정당을 위한 지원을 여타의 기본적 행정 서비스와 결합시켜서는 안 된다. 정부는 오로지 일방 정당만이 승리할 수 있도록 선거구를 획정할 수 없다. 정부는 당신에게 기본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민주당에 투표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정부는 자신을 지지하는 하나의 지역구에 자신의 권력을 사용할 수 없다. 입후보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방향으로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입후보자가 원하는 어떠한 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핵심은 결정권한이다. 민주주의는 정부가 가야 하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결정권한을 지키는 것이다. 마치 독점금지법이 상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하는 결정권한을 시장에 위치시켜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마치 인터넷에서의 공개코드 제작자가 코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하는 결정권한을 넷티즌에게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가지 맥락에서 근본적 선택은 결정권한에 대한 선택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탈중심적이고 아래에서 위로의 발전방법에 대한 최종적 권력은 유보되어 있다.
보편적인 지위(Universal Standing)
공개발전은 넷의 첫 번째 가치이다. 즉 통제는 아래로부터 위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통로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통제에 공개되어야 한다. 우리는 두 번째 가치를 보편적 지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GNU/Linux의 발전을 다시 살펴보자. GNU/Linux는 운영체제이다. 즉 GNU/Linux는 코드의 집합(a pile of code)이다. 누구나 운영체제를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코드에 접근하기 위해, GNU/Linux를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이것이 공개소스운동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공개소스소프트웨어의 코드를 자유롭게 얻고, 수정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얻고 개선시킬 때, 다른 사람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위치시켜야 한다.
다른 사람의 허가 없이도 누구나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다. 어떤 특정한 회사에 이익이 되도록 함이 없이도 그것으로 작업할 수 있다. 정부관료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도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다. 투표권을 얻지 않고서도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다. 마치 와일즈의 미완성 증명을 누군가가 해결할 수 있도록 공공영역에 위치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개코드는 다른 누군가가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공공영역 내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공공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당신은 당연히 다음과 같이 화답할 것이다.
오.. 놀랍군. 우리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데 완전히 평등하고 자유롭다. 우리는 리누스의 운영체제를 동등하고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부자든, 빈자든 거리에서 동등하게 자유롭게 잘 수 있다. 이 세 가지 경우는 형식적 평등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경우에 있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어떠한 가치가 이러한 평등을 보존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평등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그 반대이다. 보편적 지위는 불평등을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의 탁월한 바는 그것이 불평등을 생산하는 방식에 있다. 왜냐하면, IETF와 같은 조직체의 거버넌스이든, GNU/Linux와 같이 코드발전의 거버넌스이든지, 인터넷 거버넌스의 세계는 프랑스 혁명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들은 동등하게 권한을 부여받지 않는다. 모든 시민들은 동등하게 왕이 아니다. 다음을 상기하라: "우리는 왕이나 대통령도, 투표도 거부한다. 우리는 미완성된 공감대와 끊임없이 작동하는 코드를 믿는다."
왕, 대통령 그리고 투표라는 통합적 형태는 형식적 권력이다. 왕, 대통령 그리고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형식적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넷은 형식적 권력을 거부한다. 그것은 누군가가 "이것이 바로 세계가 존재하게 될 방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과, 단지 이것이 과거의 것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세계는 그것처럼 존재할 것이다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넷이 권한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클락은 미완성된 공감대와 끊임없이 작동하는 코드를 권한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이 두가지 중에서 나는 두 번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보편적 지위는 개인에게 권력이 아니라 권한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개방시켜 놓는다. 그리고 개인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권한을 얻는다. 리글과 다른 누군가가 말했듯이, "당신은 그것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우리가 주권자이다\’라고 말하는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코드를 그 작품에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을 인정하게 되는 공동체에 의해서 권한을 얻는다.
이것 또한 GNU/Linux의 세계이다. GNU/Linux는 누구든지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혼자 힘으로만 발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개선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있다. 또한 이러한 선택은 원로원(council of elders)-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가를 표시하였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누구든 코드를 위한 방향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영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코드로 이루어진다. 만약 당신이 부분적으로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버그가 있다면, 당신이 고치고 그 코드를 제공하면 된다. 코드를 추천하고, 그것에게 힘을 주는 것은 당신 작품의 특징이고 당신의 해결책이 지닌 힘과 고상함이다. 코드의 힘에 의해 미완성된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신의 지위가 아니고, 당신의 계급도 아니며, 당신 회사의 지위도 아니며, 우정도 아니라, 바로 당신의 코드 즉 끊임없이 작동하는 코드이다.
공개발전의 이념처럼 보편적 지위의 보다 복잡한 이념은 현실공간의 이념과 몇가지 부분에서 연결된다. 첫째, 시장과 연관지을 수 있다: 비록 정부가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할지라도, 시장을 개방시켜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이 존재한다. 누구나 형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누구도 시장에서 방출되지 않는다는 것들은 바로 독점금지법이 지닌 가치다. 당신과 나는 유에스 스틸사(U.S. Steel) 또는 스타벅스(Starbucks)에 대한 경쟁자로서 개업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받고 있다. 시장은 공개진입(open entry)을 보증한다. 이때의 공개진입은 단순히 시장에서 모든 사람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등한 진입을 보장한다는 것은 동등한 결과를 보증한다는 것이 아니다. 승자는 시장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시장 또한 왕, 대통령, 그리고 투표를 거부한다.
보편적 지위는 또한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이상과도 연결된다. 민주주의 이상이 실현되든 안 되든, 그것은 인종과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누구나 자신의 이념이 선택되도록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가 현실공간에서는 언제나 오직 열광자(crazies)와 부자들만이 선거에 당선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지라도, 또한 비록 우리가 현실공간에서 유력자들이 합당한 이유를 거의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지라도, 민주주의는 우리들의 이상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은 실제적으로 보인다. 마치 링컨, 웹스터 그리고 윌슨(그 외에 다른 누구?)은 보통사람에 불과하였지만, 특정한 이유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빈트 서프(Vint Cerf),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 존 포스털(Jon Postel), 존 길모어(John Gilmore), 리차드 스톨맨(Richard Stallman), 리누스 토발즈(Linus Tovalds)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유명인이 아니지만, 특정한 이유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누구나가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시장과 공개코드처럼 민주주의는 공개경쟁을 지속시킨다는 것들은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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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터넷 거버넌스에서 중심적인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두 개의 가치를 확인하였다: 첫째, 인터넷은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지라도 개선되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 둘째, 인터넷은 모두의 작품에 공개된다. 이 두가지의 가치,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지라도 개선되도록 고안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진입은 모두에게 개방된 채로 유지된다는 것은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 중심적인 것이다: 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민주주의에도 중심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지라도 정부는 발전되어지도록 고안되어야 한다는 것과 어느 누구의 작품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두 개의 가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우리 삶의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치들은 공개되지 않은 코드, 자유롭지 않은 코드 즉 대안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두 가치들은 회사의 코드에게 결정적인(conclusive) 것으로 부과하는가?
"결정적인 것"은 아카데믹을 위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떠한 것에도 공개적이고 폐쇄된 것이 공존할 수 없다는 의미를 부과할 수 없다. 우리의 세계는 공유물을 가지지만, 또한 사적 재산도 갖는다. 대학에는 과학이 있으며, 독점적인 과학도 존재한다. 극단적인 것은 교훈이 아니다. 열쇠는 균형이다. 균형은 한쪽 측면이 다른 측면의 죽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의도한다.
리누스 토발즈는 나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독점적 코드가 GNU/Linux에 결합될 수 있는지, 공개소스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독점적 코드를 반대하였는지의 의문이 제기될 때 토발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라이선스문제에 있어서, 만약 코드를 작성한 사람이 라이선스를 설정하였는데, 어느 누구라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면, 나는 저작권 라이선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불평불만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토발즈는 광신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소프트웨어의 극단자도 아니다. 그는 공유물과 사적 재산 사이에서 균형을 상상한다. 우리가 공유물과 사적 재산을 가지고 현실공간에서 살고 있듯이, 또한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공유물과 사적 재산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을 유지할 때 중요한 가치는 효율성이라는 가치보다 더 나은 가치라는 것이 사실 내가 설명하고자 하였던 연결의 핵심점이다. 인터넷 거버넌스의 가치는 거버넌스의 가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균형은 그 자체가 이 가치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 사이에 있다.
공유물로만 존재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 기초과학과 민주적 정책과 같이 모두에게 공개된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모든 공공 공원, 모든 거리, 모든 사상을 개인화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모든 측면을 개인화할 수 없다. 개인화할 수 없다라는 것은 정부가 그것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private)의 반대말은 정부가 아니다. 개인재산의 반대는 공유자산이다. 공공 거리가 있는 장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존재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물들이 다른 것에 비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가치는 효율성과는 무관하게 그러한 공간을 보존할 때 존재한다.
시장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인터넷 거버넌스라는 우리 전통의 가치. 이 모든 것은 공유자산을 위한 장소를 제시한다. 공개 시스템과 공개 코드는 인터넷 공유자산이다. 배타적인 역할이 아니라, 중심적인 역할이다. 네트워크가 운영체제로 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 균형을 이해해야 한다.
첨부 파일 과거 URL http://www.ipleft.or.kr/bbs/view.php?board=ipleft_5&id=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