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과 특허권, 무엇이 우선인가?
김인수 (정보공유연대 IPLeft 사무국장)
얼마 전 사정이 생겨 3년이 넘도록 사용해온 휴대전화 번호와 단말기를 바꾸게 되어, 평소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새 전화번호를 알려야 했다. 모든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기에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왠걸, 새 휴대전화 단말기를 들고 한글을 입력하려는 순간 무척이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와 한글입력 시스템이 다른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온 휴대전화 자판에 친숙해져 있어 새 휴대전화의 한글 자판은 도대체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글을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었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 한글자판을 외우지 못해 두 손가락만을 사용하는 이른바 독수리타법으로 띄엄띄엄 한글을 쓰던 시절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새 휴대전화와 씨름하며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중 문득 왜 휴대전화 자판은 제조회사마다 다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몇 일전 신문을 통해 읽은 \’S사 휴대전화의 천지인 한글입력 시스템에 대한 특허분쟁\’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그렇다. 휴대전화 한글입력 시스템에 특허가 걸려 있던 것이다.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L사의 휴대전화 단말기 연구소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묻기로 했다. 그 친구에 따르면, 휴대전화 한글입력 시스템은 각 회사마다 특허가 걸려있는데, 특히 한글입력이 가장 편리하다고 평가받는 S사의 천지인 입력 시스템에 대해 다른 경쟁사들이 라이선스를 맺을 것을 제안하였지만 S사는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S사가 경쟁업체들에게 자신의 특허를 사용하게 해 주어 추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따라 각 단말기 제조사들은 자체 한글입력 시스템을 개발하여 자신의 단말기에 적용하다 보니 제조사마다 한글입력 시스템이 모두 다르게 된 것이다.
궁금증이 풀리고 나니 조금은 어이가 없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자. 만약 컴퓨터 제조회사마다 키보드의 한글자판 배열이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컴퓨터를 교체할 때마다 한글자판이 바뀌어 한글자판을 새로 익혀야 하고, 집에서 쓰는 컴퓨터와 학교나 회사에서 쓰는 컴퓨터의 한글자판이 달라서 두서너 개의 자판을 외우고 다녀야 한다면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소비자들은 당장 한글자판을 표준화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을까?
이러한 일이 왜 휴대전화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걸일까? 천지인 방식이 편리하다고 하지만, 다른 방식들도 나름대로 각각의 장점이 있어서 이미 손에 익은 자판 사용에 크게 불편함이 없을 것이고, 휴대전화에 새로운 기능이 하루가 다르게 추가되다 보니, 새로운 휴대전화의 기능을 배우는 것처럼 새로운 자판을 배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휴대전화가 지능화되면서 한글입력 기능이 자주 사용될 것이며, 사용자도 기존의 20대 이하의 젊은층에서 점차 장년층 이상으로 확대될 것이므로, 한글입력 시스템의 표준화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증가할 것이다. 이에 비례하여 사용자의 불편은 커질 것이고, 사용자는 이런 불편을 겪지 않으려면 항상 같은 회사의 제품만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컴퓨터 한글자판 표준에 한글 2벌식 자판에 채용된 것은 한글 2벌식 자판이 기술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도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한글입력 시스템을 특허로 보호하여 더 혁신적인 기술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사용자들이 좀더 편리하게 느끼는 한글입력 시스템으로 표준화되어야 하고, 또 사용자들이 자신에게 더 친숙한 입력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허가 이에 방해가 된다면, 더 이상 특허가 기술발전을 통한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직 특허권자의 독점과 이익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특허권자의 독점권 행사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은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신용카드로 버스나 지하철의 요금을 결제하는 후불제 교통카드의 전면적 시행이 특허권자의 독점요구로 인해서 1년 이상 지연된 것이다. 지난 99년 서울시 지하철 공사와 2년간 독점 공급을 계약했던 K카드사가 계약기간이 끝날 즈음에 특허를 획득하여, 계약기간과 관계없이 독점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서울시와 다른 신용카드사들은 시민의 편의를 위해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교통카드 공급을 확대하고자 하는 서울시의 강력한 중재로 인해 카드 한장당 500원이라는 특허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일단락 되는 듯 하였지만, 그 로열티에 대해서 특허권자들 사이의 특허분쟁과 이해관계 조정 등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얽혀, 후불식 교통카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시기가 1년 가량 늦춰졌다. 이 기간동안 시민들이 혼란과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위의 두 가지 예와 같이 특허가 기술발전을 촉진하고 그 기술의 혜택을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데 기여하기보다는 특허권자의 독점과 이익을 강화시키는데에만 기여한다면, 당연히 특허권자의 권리를 제한하여야 한다. 특허권자가 자신의 특허된 기술을 공유하지 않는 것에 대해 특허권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공유하자는 주장이 특허권을 부정하여 발명 의욕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특허제도는 기술의 발전과 발명에 대한 보호를 위해서 한시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특허된 기술이 공공의 이익에 반한다면 독점권을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 미약하긴 하지만 현행 특허법에서도 국가의 긴급한 상황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특허권을 국가가 제한하는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 한국 특허법에서는 통상실시라고 명명한다)라는 제도가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강제실시가 허가된 예가 없지만, 미국을 비롯한 구미국가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독점방지를 위해서 어떤 특허가 경쟁사의 시장을 크게 위축시키거나 후발업체의 신규진입을 강력하게 막는다고 판단되면, 해당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를 허락할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교통카드의 예에서도 K카드사는 2년여 동안의 독점으로 인해 이미 기술개발 비용의 몇 배를 초과 회수한 상태이고, 특허를 이용해 후발업체의 시장진입을 막는 것은 명백한 특허권 남용에 해당하므로, 서울시가 강제실시를 검토하였더라면 후불제 교통카드의 전면도입 시기가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휴대전화 한글입력 시스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제조사들이 자신들의 특허를 고수하며 사용자들의 편의는 뒷전이라면, 이들의 특허권을 제한하여야 한다. 제조사들의 특허권보다는 좀더 편리한 기술을 향유할 시민의 권리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국가가 나서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특허를 상호 이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맺도록 유도하든지, 해당 특허에 대한 일정부분 보상을 한 뒤 기술표준으로 정할 수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실시를 허락하여 특허를 공유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허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특허제도의 목적은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발명에 대한 보상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는, 즉 공익과 사익의 적절한 조화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공익과 사익은 균형추를 사이에 두고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이 사익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개인의 이익 추구 행위 역시 공익을 전제하였을 때만 정당한 것이다.
첨부 파일 과거 URL http://www.ipleft.or.kr/bbs/view.php?board=ipleft_5&id=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