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강제실시를 둘러싼 지형
-이은희 정보공유연대IPLeft 운영위원
국내에서 강제실시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03년 1월에 있었던 백혈병환자들의 농성일 것이다. 강제실시란 쉽게 말해 특허권자의 허락이 없이도 특허가 걸려있는 특허발명을 다른 사람이 실시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에이즈 치료약의 특허권을 ㄱ회사가 갖고 있다면, 다른 회사는 그 약품을 함부로 만들 수 없고 약품을 만드려면 ㄱ회사와 계약을 맺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강제실시를 시행하면 ㄱ회사의 허락이 없이도 해당 약품을 다른 회사가 생산할 수 있으며 법에 규정된 약간의 대가를 ㄱ회사에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
강제실시는 특허가 개발자만을 일방적으로 보호하지 않고, 사회 공공 이익과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입된 제도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특허 발명이 특허권자가 실시하지 않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비상업적으로 특허발명을 실시할 필요가 있는 경우(특허법 107조 3항)를 고려하여 강제실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1883년 영국 특허법에 강제실시가 처음 도입된 이래 미국,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채택되었고, TRIPs협정 이후에도 캐나다, 영국, 미국 등지에서는 주로 불공정거래를 시정하기 위해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해왔다. 특히 미국에서는 100여 건이 넘는 불공정 거래 행위 사건에서 항생제, 합성 스테로이드, 생명공학 특허를 포함한 많은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를 허용한 바 있다.
그러나 오히려 3세계에서는 자국의 상황에 따라 강제실시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의 제약회사와 정부가 3세계 정부에 강제실시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시행되어야 할 강제실시는 3세계에서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고,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2001년 브라질 정부에서 에이즈 약물에 대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2003년 1월, 백혈병 환자들의 농성
그럼 백혈병 환자들은 왜 농성을 하였나? 백혈병 환자들은 2003년 1월 23일 "글리벡 보험적용 확대, 글리벡 약값 인하, 글리벡 강제 실시"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 강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글리벡은 노바티스라는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이다. 글리벡은 백혈병뿐 아니라 위장기질암이나 몇 가지 고형암에도 효과를 나타내며, 만성기 환자에서 혈액학적 반응율 98%, \’드라마틱한 치료효과\’를 보이는 \’기적의 치료제\’ 등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기적의 치료제는 너무 비싸다. 노바티스 측에서 한국에 팔려고 내놓은 가격은 한알에 23,045원이었다. 백혈병 환자들은 이 약을 하루에 6알에서 10알 정도 먹어야 하고, 보험적용을 받더라도 환자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한 달에 100만원 이상, 보험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약값만 한 달에 600만원에 이른다. 이 약값을 부담할 수 있는 환자는 별로 없다. 병을 고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약이 있는데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혈병 환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글리벡 문제 해결, 의약품 공공성 확대라는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농성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백혈병환자들과 의약품공공성확대를 위해 싸우던 진영의 대안은 글리벡 보험적용확대와 약가인하, 그리고 강제실시였다. 글리벡은 노바티스사에서 개발한 약이기는 하지만 노바티스사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다. 글리벡은 상당부분 공적기금의 원조 및 세금혜택에 힘입어 개발된 것이다. 또한 인도의 복제약 생산회사에서 노바티스 사에서 내놓은 가격의 10분의 1도 안되는 가격에 글리벡의 복제약을 내놓고 있는데, 이렇게 싼 가격이 가능한 이유는 약품생산의 원가는 얼마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허를 통해 독점권을 갖고 있는 노바티스 사는 1,000원에서 2,000원 정도의 생산비를 들여 생산한 약을 전세계적으로 23,000원 정도의 가격을 붙여서 내놓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의약품은 다른 상품과는 달리 더 공공성이 강하다. 필요한 약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의약품 공공성 진영은 이런 의미에서 2002년 1월 30일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하지만 결국 국내 특허청은 2003년 2월 "만성골수성백혈병이 전염성, 급박한 국가적, 사회적 위험이 적다"며 강제실시 청구를 기각했다. 지적재산권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코레아 교수는 그렇다면 강제실시를 하려면 환자가 백만명은 되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2003년 8월, 한국정부는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를 포기
2003년 8월, 한국정부는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를 포기했다. 8월 30일 우리나라를 비롯한 21개국은 \’국가적 비상사태나 극히 긴급한 상황아래에서만\’ 제한적으로 강제실시를 할 뜻을 밝혀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권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강제실시는 국내에서 사용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으로 합의가 되고 있어서, 요즘 지적재산권 논쟁의 중요한 이슈는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이다. 예를 들어 에이즈 치료에 드는 약을 사려면 일년에 약 만 달러정도가 드는데, 인도의 복제약 회사인 시플라 사는 에이즈 치료약의 복제약을 일년에 350달러 정도에 생산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나라들은 이 복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아서 인도나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복제약을 수입해야만 한다. (인도는 2005년까지 물질에 대한 특허를 인정하지 않을 예정이며, 이에 따라 인도의 시플라 사나 낫코 사 등은 국제적인 제약회사들이 만드는 약의 복제약을 생산해왔다. 국내에서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글리벡이 필요한 급성골수성백혈병과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 환자들은 낫코 사에서 만드는 글리벡 복제약을 개인적으로 수입해서 먹고 있다.)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를 포기하는 것은 이들 빈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같은 중진국/개발도상국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한국은 자체적으로 의약품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이고, 인도의 복제약은 한국으로 강제실시라는 명목으로 ‘수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의 글리벡 복제약 ‘비낫’은 한국의 몇몇 환자들에게 ‘자가치료용’이라는 별도의 수단을 통해서 국내에 들여올 수 있었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는 멀리 동떨어진 타국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같은 중진국의 민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 것이다.
2001년 도하선언 및 2003년 있었던 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도 결의한 바, 누구나 필요에 의해 의약품을 먹을 수 있는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 또한, 특허보다 공중보건 및 생명이 우선이라는 대원칙을 우선해야 한다. 특허권 보장을 빌미로 에이즈 등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나라들의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특허권은 선진국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배를 불리는 결과만을 낳는다.
후퇴하고 있는 의약품 공공성
지난 11월 인도특허청은 인도노바티스(Norvatis India)사에 인도 내 글리벡 독점판매권(Exclusive Marketing Right, EMR)을 부여했다. 이는 인도에서 생산되어 온 글리벡의 복제약 생산의 중단명령에 해당하는 조치이다. 인도 특허법은 \’1995년 1월 1일 이후 외국에서 특허출원된 의약품에 대해\’서만 \’인도시장에서 독점판매권을 인정\’하고 있고 글리벡 특허는 1993년 스위스에서 출원된 것이기 때문에 인도내 독점판매권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이례적으로 독점판매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불법성 때문에 인도의 6개 제약회사들은 인도정부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인도에서 글리벡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글리벡 복제약품을 구입해서 생명을 연장하던 한국과 전세계의 환자들이 1년간 3240만원을 약 구입비로 내놓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는 인도 미디어의 기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환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사실 한국의 의약품시장이나 전세계적인 의약품 복제약 시장은 그리 크지 않다. 노바티스 사와 같은 다국적 의약품 회사들은 국가마다 다른 가격으로 약을 내놓았을 경우 규모가 큰 선진국 의약품 시장에서 의약품 인하 압력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잘사는 나라이든, 가난한 나라이든 전세계적으로 약값을 통일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허에 의해 의약품 공공성이 이렇게 후퇴하고 있는 상황은 전세계적으로 완전하게 의약품특허를 관철하여 시장을 잠식당한 약간의 가능성도 모두 없애려는 다국적제약자본들의 노골적인 속셈을 드러낸다.
첨부 파일 과거 URL http://www.ipleft.or.kr/bbs/view.php?board=ipleft_5&id=395